[책] 멋진 신세계
[책]
한줄평: 진리보다 안정이 우선시된 세계에 대한 불편함

고도로 발달한 기계, 과학문명을 그리는 소설이다. 태어날 때부터 조작되어 알파, 베타, 델타의 삶이 정해지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과 대비되는 아직 원시적인 세계에 사는 '야만인'을 그리는 이야기이다. 전체주의의 독재자를 가진 '신세계'를 그리는 소설이다.
[잡상]
낙원은 존재하는가?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간다. 항상 더 나아간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그것이 물질적인든, 쾌락적이든 끝 없이 추구한다. 그 속에서 세계는 발전하여 더 많은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삶의 질을 형상시키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전쟁과 같은 비극을 통해 서로를 헐뜯가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 대해서 책은 '과연 진정한 낙원은 없는가? 낙원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모든 인간이 행복한 유토피아는 존재하는가? 그것이 과연 진정히 의미있는 세계인가?'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는 극도로 발전된 과학기술을 통해 자신만의 낙원인 '신세계'를 그려냈다. 노예를 인공수정 때부터 설계하고, 노예가 노예 생활에 행복하도록 일을 부여한 전체주의 정부 세력하 만들어진 세계이다.
독특한 개성이란 미덕과 행복에 이바지하지만 보편성이란 지적인 필요악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계층은 사상가들이 아니라 실톱으로 뇌문 세공을 하는 기술자나 우표 수집가 따위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지상至上의 선善’으로서의 행복에 대해서 그들이 지녔던 신념을 상실하게 하고 대신에 목적이란 현재의 인간 세계를 벗어난 어디엔가 존재하며, 인생의 목적이란 복지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강화하고 정제시키는 무엇, 지식을 확대시키는 무엇이라고 믿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옳은 얘기일지도 모르겠다고 통제관은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사상이었다. 그는 다시 펜을 집어서 ‘출판 불가’라는 단어 밑에다 처음보다 훨씬 굵고 시커멓게 두 번째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한숨을 지으며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마치 진리와 아름다움이 지상의 선일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떠들어댔어.
'신세계'는 물질적인 복지와 안정만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조작된 세계인 것이다. 지식, 아름다움, 개개인의 독립성은 금기화된 세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세계'는 멋져보이지만,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인간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취급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쾌락보다는 지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안정보다는 고통을 수반한 여정이 더 인간다운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불안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임을 받아드려야 한다. '낙원은 있는가?' 에 대한 질문에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낙원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독시' 웹툰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빛에는 그림자가 있듯이, '낙원에는 대가가 있다.' 얻는 것만큼 우리는 놓치는 것이 생길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한다. 미리 정해진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면 정해진 답만 찾는다. 그리고 이외에 놓치는 가치가 많을 것이다. 인간이란 불안정하고 낙원 또한 불안정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낙원은 없을 수 있다. 오히려 낙원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가 무한정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정의와 권력에 대해 다루는 촘스키와 푸코의 대화를 보았다. 여기서 과학적 기술이 발달한 세계에 대한 토론을 하는데, 촘스키는 인간의 창조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세계를 이상적인 세계로 보았다. 푸코는 반대로 이 또한 인간 본성을 정의하는 행위이며, 이것이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낙원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정의하고자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과학과 기술이 이상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에 대한 청사진은 그리기 어렵더라도 이를 그리고하는 노력은 항상 필요하다고 본다.
종교의 신과 신세계의 국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랑한다는 것―.” 국장이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다. 불가피한 사회적인 숙명을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만드는 훈련, 모든 습성 훈련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러한 여러가지 방법 중 가장 많은 유형이 종교에 의지하거나, 시스템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가지 접근 방식은 외부의 존재에 의지한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지만, 커다란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종교는 신과의 관계를 인지하고 이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반면, 시스템는 시스템 속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고, 알더라도 이를 통해 성장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국장이 하고자하는 행위는 삶의 의미를 없애버리는 행위인가? 사실 만약에 종교에 의지하는 방식과 시스템에 의지하는 방식이 서로 혼용되어 서로 분간할 수 없다면, 이러한 외적 존재에 의지한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나 싶긴 한다. 결국 스스로 온전히 좋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외적의 존재 여부과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긴 하더라도 괜히 시스템에 기대는 것은 불편함이 존재한다.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닐까?
[필사]
현대 의상을 걸친 프로크루스테스라 할 수 있는 핵 과학자들은 인간이 누워야 할 침대를 마련할 텐데, 혹시 인간의 키가 침대에 맞지 않는다면―글쎄, 그렇다면 인류의 운명은 암울해진다.
능률적인 전체주의 국가라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정치 두령들로 이루어진 간부진 그리고 그들이 거느린 대규모 관리층을 동원하여, 노예 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억압할 필요조차도 없는 무수한 노예들을 통제한다. 오늘날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노예들에게 그런 삶을 사랑하게끔 만드는 것이 선전 기관과 언론인, 학교 선생들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 여러 선전기관, 언론, 학교가 바로 노예가 노예 생활을 사랑하게끔 유도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라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인지해야 한다. 아니면 사회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자연스럽게 전락할 것이다. AI의 발전으로 인해 능률적 전체주의가 실제로 실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AI는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된 시스템 구축에 일조할 가능성이 크다.
진리는 위대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진실에 대한 침묵이 더욱 위대하다.
하지만 안정이란 사람들이 아주 빨리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안정의 성취는 단순히 피상적이고 외적인 혁명에 지나지 않는다.
=> 안정은 피상적이다. 안정한 상태라는 것은 사실 없다. 따라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실제로 안정하지 않을수도, 안정하지 않는 것은 안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실 안정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High Risk High Return이 어쩌면 가장 '안정'할 수도 있다.
노예 생활을 사랑하는 속성이란 인간의 이성과 육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깊고 개인적인 혁명의 결과 이외에는 무엇으로도 달성되지 못한다. 그런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발견과 발명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첫째, 굉장히 발달된 유인의 기술로, 어릴 적에는 조건 유도를 하고, 나중에는 스코폴라민••• 같은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둘째, 인간적인 차이점들에 대해서 완전히 발달된 학문이 이루어져 정부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도 사회적 또는 경제적 구조상에서 그에게 적절한 자리를 제공할 수가 있어야 한다. (사회 부적임자는 사회 체제에 대해서 위험한 관념을 갖게 되고, 그 불만을 타인들에게 전염시키는 경향을 나타낸다.) 셋째, (아무리 이상향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상당히 자주 현실로부터 휴식을 취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기 때문에) 술이나 헤로인보다 덜 해로우면서 기쁨을 더 많이 제공하는 무엇, 그러니까 알코올이나 다른 마약들의 대용품이 필요해진다. 넷째, (비록 이것은 장기간에 걸쳐 실시돼야 할 계획이라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려면 전체주의적인 통제가 여러 세대 동안 필요하겠지만) 관리층의 과업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제품을 규격화할 수 있도록 설계된 완벽한 생물개량학이 필요하다
=>노예 생활을 노예가 사랑하게 만드는 법. 어릴 때부터의 유도, 적절한 일의 공급, 마약의 대용품, 생물개량학. 생물개량학은 영화 <가타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 성취하려는 어떤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로 이루어진 종족을 창출하는 수단으로서 응용과학을 이용하고 분산화하는 쪽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선택은 (만일 전쟁이 제한된 경우라면 군국주의가 영구화되겠지만) 원자탄의 공포에 뿌리를 두고 그로 인해서 문명 세계를 파괴하게 될 수많은 무장한 민족주의적 전체주의 국가의 형태다. 다른 한 가지 선택은 전반적이고 급속한 기술상의 발달로 유발된 사회적 혼란에 의해서 생성되고, 능률성과 안정의 필요성에 따라 유토피아라는 복지 독재사회로 발전하는 하나의 초국가적 독재 체제다. 인간은 선택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소설
앵초櫻草•와 풍경은 보상이 없다는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을 지녔다고 그가 지적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공장이 바삐 돌아가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사랑을 하급 계층들 사이에서만이라도 제거하기로 결정이 났는데, 그것을 제거하더라도 교통수단을 쓰려는 성향은 그냥 둬야 했다. 그들이 비록 싫어하기는 하더라도 계속해서 시골을 찾아간다는 조건이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어휘가, 이성이 배제된 어휘가 꼭 필요하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최면 학습이 해답이다.
밀랍• 방울이랄까, 어떤 물건 위에 떨어지면 거기에 달라붙어 표면을 덮고는 결국은 모두가 주홍빛 바위와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방울들
육체적인 결함은 일종의 정신적인 과잉을 유발시킨다. 같은 과정이 역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가능한 듯했다. 정신적인 과잉은 나름대로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금욕주의라는 인위적인 불감증을 유발시키기도 하는데, 고의적으로 자초한 이런 고독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항상 어른일 가능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요.”
알파들은 구태여 애를 쓰지 않더라도 정서적인 면에서 저절로 아이들처럼 행동하도록 길이 들었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지상至上의 선善’으로서의 행복에 대해서 그들이 지녔던 신념을 상실하게 하고 대신에 목적이란 현재의 인간 세계를 벗어난 어디엔가 존재하며, 인생의 목적이란 복지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강화하고 정제시키는 무엇, 지식을 확대시키는 무엇이라고 믿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옳은 얘기일지도 모르겠다고 통제관은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사상이었다. 그는 다시 펜을 집어서 ‘출판 불가’라는 단어 밑에다 처음보다 훨씬 굵고 시커멓게 두 번째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한숨을 지으며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성에 침투해서 방해를 하던 관념들과 욕구, 잡념들로 인해 간섭을 덜 받아 사고력이 명석해지면, 그제야 구름 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타난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빛의 원천을 향하고 그 빛을 보고 느낀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현상이 내면이나 외부로부터의 인상들에 의해서 더 이상 속박을 받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존속하는 무엇에―그러니까 절대적이고도 영구한 진실처럼 절대로 우리에게 거짓된 장난을 치지 않는 어떤 현실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감각들의 세계에 생명과 매력들을 부여하는 모든 힘이 이제는 우리로부터 흘러나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신에게로 향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이 종교적인 감정이 본질상 너무나 순수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영혼을 매우 기쁘게 해주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모든 다른 상실을 보상해준다."'
=> 젊음과 번영에 의해 종교가 팔요하지 않다는 입장
‘사람이란 젊음과 번영을 누릴 때만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며, 독립은 끝까지 안전하게 이끌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우린 지금 종말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젊음과 번영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답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우리는 신으로부터 독립하게 되겠죠. ‘종교적인 감정은 모든 상실에 대해서 우리에게 보상을 해준다.’ 하지만 우리가 보상해줘야 할 손실은 하나도 없고, 종교적인 감정은 불필요합니다. 도대체 젊음의 욕망이 전혀 감소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가 젊음의 욕망에 대한 대용품을 찾아 나서야 하나요?
순결은 욕정과 신경 쇠약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욕정과 신경 쇠약증은 불안정을 의미하고, 불안정은 문명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사악한 쾌락이 풍요롭지 못하다면 문명은 영구적으로 존재할 길이 없어요
=> 순결에 대한 정의, 순결에 대한 무스타파 몬드의 해석
옮긴이의 말
과연 사회 안정과 물질적인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 미래 이상향의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할까?
결국 야만인은 고통과 불행을 달라고 부르짖고는 외딴 등대로 가지만, 그곳에서 과연 그는 갈망하던 원시적인 평화를 누렸던가?
인간의 잠재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사회에 관한 얘기니까요……. 아직 결론은 내리지 못했는데, 사실적이 되려면 낙원을 상실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아요.
소마가 ‘의식을 포기하는 수단’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주체성이 없는 ‘기계의 부속품’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도 대두된다. 과학과 행복과 인간성의 함수는 결국 기계 문명만이 남는다는 불평등 방정식을 남긴다.